논설ㆍ기고

[칼럼] 잊혀졌던 선농단

2015년 4월 우리나라 선농단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알리는 선농단역사문화관 개관

작성일 : 2018-01-07 16:03 기자 : 이민수

선농단역사문화관장 김혜리

 

동대문구 제기동에 위치한 선농단(先農壇)은 조선 성종 7년 지어진 제단으로 이곳에서 왕과 신하 그리고 백성들이 모여 한해의 농사가 잘 되기를 기원하고, 특히 왕이 직접 밭(籍田)으로 나가 백성들이 보는 앞에서 밭을 갈고 씨를 뿌리는 친경을 통한 경세애민(經世愛民)을 실천했다는 점에서 이 선농단의 가치를 단순한 건축물로 볼 수는 없을 것이다.

 

이러한 깊은 의미를 가진 선농단은 조선시대 이 후 인근 지역에 살고 있던 지역민들과 사람들의 머릿속에서 점차 사라져 갔다. 그리고 이곳이 선농단으로 다시 문화재로서 재조명받기 전까지 청량대, 청량공원 등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시작은 일제가 조선의 식민지화로 야욕을 들어내던 구한말부터 시작된다. 당시 일제는 환구단, 사직단, 종묘와 일부 제사를 남기고 모두 합사하거나 폐지하였으며, 이 범위 안에는 선농단 또한 포함되어있었다. 선농단의 신위는 사직단에 합사하게 되었으며, 거의 국유화하거나 지방관청의 소유로 만들었다.

 

그리고 선농단에는 청량대라는 비석과 함께 공원이 조성되었으며, 경성여자사범학교가 세워지면서 제단의 역사성과 문화성은 손실되기 시작하였다.

 

일제강점기가 끝난 이후에도 이렇게 손실된 역사성와 문화성은 회복되지 못했다. 6.25전쟁이 끝난 이후 이곳에 서울대학교사범대학이 자리잡게 되었고 선농단에 대한 인식은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이 당시 사범대학교 대학신문에는 이곳에 대한 당시 학생들의 인식이 담긴 기사가 남아있다.

 

“. . . 호탕하게 떠들어대는 남학생들의 웃음소리에 청량대는 언제나 활기에 넘친다. 그 옛날 지존의 왕이 친히 백성들의 농사짓는 것을 바라보았다는 유래를 지니고 있는 곳. . . 휴지가 멋대로 버려진 청량대. 그러나 사대생은 청량대를 빼놓고 대학생활을 말할 수 없으리라.”

 

- 서울대학교 <대학신문> 1961. 4. 27. 발췌-

 

이곳이 어떤 곳인지에 대해서는 당시의 대학생들로 어느 정도의 인식은 있었지만 결국은 청량대라는 공원으로서의 인식이 더 강했음을 알 수 있는 기사이다.

 

선농단이라는 이름이 다시 지역민들과 일반인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한 시기는 선농단이 복원되고 선농대제가 다시 복원되기 시작한 1970년도 무렵부터이다. 1979년 지역 주민들에 의해 선농단에서 선농대제가 복원되었고, 이후 주민들과 지자체의 관심이 증폭되며 선농단이라는 이름이 다시 지역주민들에게 각인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선농단에서 지내던 선농대제는 동대문구의 큰 행사로 발전하였으며, 이러한 선농단의 역사성과 문화성은 좀 더 지역민들과 일반시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였다.

 

20154월 우리나라 선농단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알리는 선농단역사문화관 개관을 통해 선농단(유형문화재 사적436) 콘텐츠를 활용한 체험과 교육등의 프로그램으로, 다양한 계층에게 선농단을 알리고, 이와 함께 우리의 문화재를 통해서 지역민들과 일반인들에게 문화향유를 확대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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